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문단 편집) == 배경 == [[1611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마술리파트남에 무역 거점을 세우면서 인도 아대륙에 발을 들인 [[영국]]은 [[7년 전쟁]]의 승리로 인도 아대륙[* 아대륙이라 하지 않고 그냥 [[대륙]]이라 할 경우 그 면적이 일반적우로 호주 이상일 경우다. 따라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와 호주를 대륙이라 하지만 개별 국가인 중국과 미국도 그 면적이 호주보다 크므로 종종 대륙이라 부른다. 인도나 아라비아 반도는 대륙은 아니지만 대륙에 준하는 면적이므로 아대륙이라 칭한다.]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세포이 항쟁]] 직후인 1858년 식민지인 [[인도 제국]]을 세우면서 영국은 인도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 그러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인도 제국|인도]]의 식민 종주국이었던 영국 본국에서 [[윈스턴 처칠]]이 물러나고, 인도를 비롯한 영국의 해외 [[식민지]]와 해외 영토들의 자결권을 주장하던 [[클레멘트 애틀리]]가 [[총리]]가 되면서 인도의 독립이 가시화 된다. 그러나 독립을 목전에 두고 영국의 식민지 지배 아래 눌려 있었던 [[힌두교]]-[[시크교]]의 비무슬림 세력과[* 지금은 힌두교가 인도 내의 우세 종교가 되어 시크교를 핍박하면서 두 종교의 관계가 매우 험악하고 시크교 분리주의 테러도 심심찮게 일어나지만, 무굴 제국 시절에는 둘 다 이슬람교에 의해 탄압받던 동병상련의 처지였다. [[자한기르]] 시절 시크교 교주인 아르준이 힌두교 탄압 중단을 요청했다가 순교했을 정도로 연대의식을 가졌다. 이 사건을 들어 시크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교주가 다른 종교를 위해 희생한 종교라고 주장한다.] [[이슬람]]의 무슬림 세력간의 [[종교]]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무슬림 세력이 [[파키스탄|인도 내 무슬림 국가]] 수립을 요구하자 비무슬림 세력이 이를 억누르는 과정에서 급기야 인도 아대륙 전역에서 비무슬림과 무슬림 간의 충돌과 보복 [[학살]]이 일어나 수십만 명이 죽는 등 인도는 종교집단 간 준내란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러한 인도 내부의 종교간 갈등과 유혈 분쟁이 더 이상 제어할 수 없게 된 영국은 결국 인도 아대륙 내 무슬림 국가와 비무슬림 국가의 별개 독립을 인정한다. [[1947년]] [[8월 14일]]에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인더스강 유역과 동벵골 지역이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그 다음날인 [[8월 15일]]에는 비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 지역이 [[인도 자치령]]으로 각각 독립시켜버린다. 이런 종교 갈등 속에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통일 인도와 종교간의 화합을 외치며 인도 대륙이 파키스탄과 인도로 갈라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분열을 막는 데 실패했고, 간디는 [[1948년]] 극렬 힌두교 신자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그리고 별개로 독립한 파키스탄과 인도는 독립 직후부터 지금까지 [[카슈미르]]의 지배권을 두고 싸우며 철천지 원수 관계가 된다. 한편 종교적인 문제로 인도와 갈라서게 된 파키스탄은 인더스 강 일대의 서파키스탄과 갠지스 강 삼각주 일대의 [[동파키스탄]]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두 지역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사실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은 '''종교 및 종파만 같은 이슬람 수니파를 믿었지 [[문화]], [[인종]], [[언어]] 등 모든 부분에서 공유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서로의 힌두교도 이웃들과의 공통점이 더 많았을 것이다.) 거기에 지도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인도가 중간에 껴서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을 멀찍이 나누고 있었다. 두 국가 간 가장 가까운 거리는 약 1500km,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와 다카 간의 거리는 약 2000km에 달했다. 파키스탄 독립을 이끈 [[모하마드 진나]]는 [[루이 마운트배튼]]에게 제시받은 인도-파키스탄 분할 계획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분리독립을 포기하고 그냥 [[자와할랄 네루]]가 수상이 못 되게만 하는 계획을 고려하기도 하였고[* 진나는 공개석상에서 강경하게 파키스탄의 독립을 주장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냥 영국놈들을 못살게 굴어서 네루에게 권력을 주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발언을 측근들에게 자주 했다고 한다.][* 후반부에서 이 시기를 심도 있게 다룬 영화 <[[간디(영화)|간디]]>에서는, 아대륙 양 끝으로 떨어진 동서 파키스탄의 분리독립도 불사하는 진나에게 간디가 그러지 말고 그대가 총리가 되어 무슬림 내각을 꾸리라고 애원하는 (감동적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부정확한) 장면이 나온다. 진나는 거의 마음을 돌릴 뻔 하지만 힌두교도 진영의 반발로 결국 없던 일이 되는데, 당시 워낙 힌두-무슬림 갈등이 극심했던 탓에 새로 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도제국 총참모부 측에 파키스탄의 지정학적인 구도가 생존이 가능한 것인지를 계속 문의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인도제국군 총참모부 측은 캘커타가 파키스탄에 포함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며, 캘커타가 파키스탄 영토에 포함되도 소련의 침공으로부터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정작 파키스탄 분리독립이 초읽기로 다가오자 진나는 문화적 정체성이 신앙에 우선한다는 이율배반적 논리를 내세워 (서)파키스탄의 영토를 최대한 확대하려 했으나, 마운트배튼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최소한 펀자브 주와 벵골 주 전체를 파키스탄에 포함시키려 했던 진나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마운트배튼은 파키스탄이 당시와 같은 기형적인 형태로는 25년 이상 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하였고, 실제로 파키스탄 건국 24년 만에 동벵골이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그의 예측은 현실이 되었다. 일단 벵골 무슬림들은 파키스탄에 합류하는 것에 긍정적이었다. 우선 무굴 제국 붕괴 이후 그전까지 무슬림에게 탄압받던 힌두교도들이 영국 통치 하에서 신식교육을 받고 변호사, 기술자, 의사가 되어 무슬림보다 부유해진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으며, 벵골의 힌두교인 지주들의 착취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독립 파키스탄 수뇌부는 진나를 비롯한 서파키스탄 출신들이 대거 장악해서 동파키스탄의 영향력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파키스탄 중앙 정부는 철저히 서파키스탄 위주로 운영되었고, 심지어 동파키스탄에서조차 고위 공직은 서파키스탄 출신들이 차지하고 중간관리직으로는 인도에서 동파키스탄으로 피난온 [[무하지르]]를 우대하는 등, 토착 벵골인들은 거의 배제당하다시피 했다. 동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으로부터 공공연하게 머저리들, 검은 유인원 소굴이란 식으로 비하당했으며, [[쌀]], [[소고기]], [[생선]] 등 모든 식량자원들을 서파키스탄에 수탈당했다. 그리고 동파키스탄에 배정되는 예산은 서파키스탄에 배정된 예산의 40%선에 불과하는 등 공공연한 차별을 받았다. 문제는 '''인구 자체는 동파키스탄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독립전쟁 직전 파키스탄의 인구가 서파키스탄은 6000만, 동파키스탄은 6800만이었다. 21세기 오늘날에는 뒤집혀 파키스탄 인구가 방글라데시보다 훨씬 많다.]. 결국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서파키스탄 주도의 정부에 대한 불만은 점점 쌓여만 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